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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속보

[단독] 중앙대 학생 시국선언문의 심장, 정현석·홍서희 학우를 만나다

by 중앙문화 2024. 12. 9.

[단독] 중앙대 학생 시국선언문의 심장, 정현석·홍서희 학우를 만나다

 

편집장 김서현

부편집장 석기범

편집위원 강시현



▲ 2024년 12월 9일,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법학관 앞에 붙어 있는 정현석(21) 군의 대자보

  

 

 12월 3일 오전 10시 23분,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장장 6시간 만인 12월 4일 오전 4시 30분에 해제되었다. 학교의 열기도 뜨거웠다. 중앙대학교 학생커뮤니티 ‘에브리타임’은 혼란스러운 정국을 논하는 공론장이 됐다. 

 교지편집위원회 〈중앙문화〉는 중앙대학교 학생사회에서 목소리를 낸 이들을 찾았다. 익명의 탈에서 벗어나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가장 먼저 시국선언문을 작성한 학생들이 있었으니, 바로 정현석 학우(전자전기공학부 21)와 홍서희 학우(독일어문학과 19)다.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으며 더 나은 학생사회로 나아가 보자. 



Q. 12월 3일 밤에 어떤 일을 하고 계셨는지.

 

현석 : 이제 곧 시험이니까 도서관 2열람실에 앉아 있었어요. 열람실에서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친구들 카톡 보고 계엄령인 것을 알게 됐어요. 중앙대학교가 여의도와 가까이 있다 보니까 도서관 안에서도 헬기 소리가 계속 들렸어요.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었지만, 실제로 헬기 소리가 너무 크게 가까이 들리니까 그제야 계엄이라는 사실이 피부로 확 와닿았죠. 

자연스럽게 도서관을 드나드면서 매주 마주하는 의혈탑이 생각났고, 그분들에게 감정이 몰입되기 시작했어요. 예전에도 의혈탑을 보면서 비슷한 일이 생기게 되면 ‘나도 저들처럼 나갈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소리가 크게 나서 도서관에서 공부에 집중을 못 하고 있었어요.

 도서관에서 집중이 안 돼서 집으로 갔어요. 저는 지방에서 올라왔는데, 동네 친구들이 ‘서울에 진짜 군인들이 있냐’는 연락을 했었거든요. 그것을 소리로도 느끼고 눈으로도 봤으니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서희 : 저는 처음에는 딥페이크 경고글 같은 줄 알았어요. 계엄이 정확히 뭔지 잘 몰랐고, 실제로 경험해 본 적이 없어 부모님께 여쭤봤더니 ‘한강을 다 막을 거다’라고 답했어요. 학교를 못 가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교수님들을 떠올리면서 시국선언문을 쓰던 교수님들이 제일 먼저 잡혀가지 않을까 걱정됐어요. 제가 보내는 문자, 전화, 메일이 추적될 것 같아 서 교수님께 메일을 쓰지 않았고, ‘제발 SNS에 글 올리지 마시라’고 속으로 생각했어요. 특히 독어독문학과 교수님들은 사회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하니까요.



Q. 글을 작성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업무나 성향이 대자보를 쓰는 데 영향을 미쳤는지. 

 

현석 : 에브리타임(이하 에타)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전기전자공학부 학생이 이걸 쓰는 게 이상하다는 댓글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댓글들은 저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어요. 그것보단 우리가 대학생, 그중에서도 중앙대학생인 것이 컸다고 봐요. ‘의에 죽고, 참에 살자’가 단순한 슬로건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중앙대생이라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하지 않을까 해요. 또, 인터뷰를 하기 전에 이야기했지만 저는 사실 정치 성향이 진보는 아니고, 중도에서 보수에 좀 더 가까워요. 그래서 계엄 이전까지 탄핵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입장이 아니었어요. 교수님들이 시국선언문을 작성하실 때도 심정은 이해했지만, 아쉬웠던 문단도 조금 있었거든요. 하지만 계엄이 선포되었을 때는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원래는 찬성하지 않고 있었지만 저의 생각을 한번에 돌릴 만큼 심각한 일이 일어난 거죠. 그것은 굉장히 큰 문제가 맞고, 실제로 헌법질서를 흔들어 놓은 거니까요. 

 두 번째로,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포고령을 읽으면서 포고령 속에 그려진 사회를 생각했던 것 같아요. 평소대로면 저도 시위에 나가고 했겠지만, 부모님께 전화로 들은 첫번째 말은 ‘시위에 나가지 말라’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저도 포고령에 그렇게 적혀 있으니까 행동하지 않았거든요. 비상계엄이 해제되자마자 소중한 자유를 얻은 것 같아요. 

 어제는 아무것도 못했지만 지금은 당장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나에게 ‘당장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는 생각이 컸어요.

 

서희 : 저희가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지를 되짚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저도 개인적으로 원고 작성을 하는 중이었고, 그런 와중에 낮에 현석이가 ‘누나가 동참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고, 저도 계엄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많이 한 건 없었어요. 우리가 어떤 개인정보를 받고 어떻게 사용할지, 대자보를 어떻게 붙일지에 대한 논의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Q. 대자보나 관련 문서를 작성해 보신 경험이 있는지. 작성하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으셨는지.

 

현석 : 대자보를 한 번도 작성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쓰는데 굉장히 어려웠죠. 굉장히 어려워서 고려대학교에서 계엄 며칠 전에 개인이 쓰신 시국선언문을 참고 많이 했어요.

 

서희 : 현석의 대자보를 받았을 때 제가 특별히 수정제안을 준 것은 없었어요. 저는 이제 학생회장 출신이기도 하고 대자보를 쓴 경험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현석이가) 저에게 ‘높임법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물어보더라고요. 저는 ‘반말은 그저 좀 더 강경할 뿐이지 큰 상관이 없다’라고 답했어요. 

 실제로 선언문은 개인의 서사가 담겨 있는 글이라서 많은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엄청나게 많은 학생들이 참여를 했는데 작성 주체가 개인이라 그런 게 아니냐고 생각했어요.



▲ 중앙문화 인터뷰에 응해주시는 홍서희 학우(좌), 정현석 학우(우)

 

 

Q. 아무것도 공개된 것이 없는 상황에서 개인의 이름을 걸고 대자보를 쓰는 것이 부담되지는 않았나. 압박감을 어떻게 대처했는지.

 

현석 : 엄청 부담스러웠죠. 가슴이 엄청 쿵쾅쿵쾅 뛰었어요. 일단은 도서관에서 혼자 계속해서 적었거든요(웃음). 제가 원래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사실 (이런 행동이) 이제 잘못된 행동일 수도 있으니까, 제 주위 지인 중에서 가장 잘 아는 서희 누나에게 먼저 연락했어요.

 

서희 : 저는 저에게 연락을 해서 아주 감동이었어요.

 

현석 : 맞아요. 그리고 사실 부담이 엄청 컸는데, 그래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제가 개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시의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워낙 상황이 빠르게 변하고 뉴스도 빠르게 나오는 상황 속에서 신속하게 행동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학생회 소속도 아니었는데, (서희 : 저는 처음에 학생회 소속인 줄 알았어요. 나에게 요구하니까 뭐지? 이렇게 사람이 없나?라고 생각했어요.(웃음)) 그래서 저는 오히려 단체가 이니까 오히려 제가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생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와중에  이 상황을 정리할 목소리가 없었던 것 같아요. 모두가 우리와 비슷한 학생이니까 용기를 주고 싶다는 생각이 컸어요. 

 촉매가 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총학생회가 바뀐지 얼마 안 되어서 그들의 입장을 공감할 수 있었어요. 또, 한 명의 개인이 쓰고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이 가시적으로 보이면 그들이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아까 이야기했던 고대 학생이 계엄 하루 전에 시국선언문을 해서 대자보를 붙인 것이 인상 깊었거든요. 그래서 충분히 우리 학교에서도 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이 들었고, 정말 부담되었지만 혼자 작성했어요.

 

서희 : 중요한 것은 저에게 할 말 중에 시발점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이게 좀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고, 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현석 : 그래서 둘 다 개인이니까 기폭제 같은 역할이 제일 컸고 그것이 가장 큰 목표 중 하나였어요. 충분히 역할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Q. 대자보를 작성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가 무엇이며, 어떻게 포함하려고 노력했나. 

 

현석 : 앞의 질문과 이어서 이야기하자면 용기를 주는 것이 제일 컸어요. 그리고 그런 행동을 일부러 많이 하려고 노력했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성공한 것 같아요. 중앙마루 광장을 걸어오는데, 저희 대자보를 포함해서 8장이 붙여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목표는 달성한 것 같다고 생각해요. 

 사실, 일부러 에타에 댓글이 달릴 때마다 좋아요를 하나씩 눌러서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어요. 대댓글을 달지 않은 채로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도록 놔두었어요. 

 

현석 : 질문에 대해서 좀 더 답을 하자면 ‘계엄령만 담자’는 마음이 가장 컸어요. 많은 의견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정치적인 입장을 아예 담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계엄 선포는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위헌적 행동이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건  아까 말씀드렸던 ‘학생들에게 용기를 주자’라는 내용과도 맞닿아 있던 건데, 최대한 많은 학생이 정치 진영과 상관없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담는 것이 목표였어요.

 또, 그중에서도 사실 관계가 확인되었던 내용만 담았어요. 저희 대자보를 보면 ‘질서 있는 퇴진’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시국선언이 많이 나오고 탄핵론이 주가 되는 가운데, 최대한 많은 학생이 거부감 없이 같이 참여할 수 있게 하려고 그런 단어를 선택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시국선언문은 중앙대학교 학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저희 슬로건인 ‘의에 죽고, 참에 살자’의 이야기도 같이 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제가 느낀 바이기도 했고요. 자연스럽게 계엄령을 인지했고 과거 선배들도 생각하면서 용기를 냈기 때문에, ‘다 같은 중앙대생으로서 공감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어요. 

 

서희 : 총학생회에서 대자보를 작성하려면 학생들이 해당 상황에 대해 공감하는지가 중요한데, 이미 많은 학우가 참여해서 ‘우리가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아요. 학생 자치단체들이 대자보를 쓸 수 있도록 저희가 동기를 제공해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Q. 대자보를 준비하면서 대학 내부의 다른 학생자치단체에 연락을 해볼 생각은 없었나.

 

현석 : 소통에 대해 답을 하자면 댓글로 ‘좋아요’를 달아주는 것이 제일 컸고, 새벽 5시까지 안 자고 계속해서 좋아요를 눌렀어요. 그리고 서희 누나가 소통 방안에 있어 아이디어를 줬던 것 같아요. 연락을 받을 수 있는 이메일을 남겨주면 좋을 것 같다고 했었고, 실제로 몇 개의 메일을 받았어요. 다빈치캠퍼스에서도 ‘캠퍼스가 달라서 아쉽다’며 대자보를 붙여도 되는지 물어봐서 당연히 붙이라고 했죠.

 ‘사람들을 많이 모았으니 총학과 같이 추진하자’라는 댓글도 있었는데, 저는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기 때문에 따로 시국선언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설령 그들이 시국선언문을 작성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선택이니까 존중하는 마음으로요.




▲중앙대학교 학생들은 대자보에 포스트잇을 붙여 다양한 의견을 남겼다.

 

 

Q. 학생들의 반응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현석 : 일단은 사실 전 이 정도로 많이 참여해 주실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연대의 소중함을 많이 느꼈어요. 많이 배웠고, 대부분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따로 연락이 와서 도움이 되고 싶다든지, 뭐라도 선물을 주고 싶다는 이야기도 많이 받았어요.    

 저의 첫 목표가 ‘용기를 주자’였는데, 연락도 많이 받아서 그게 가장 기억에 남았어요. 모든 것이 다 좋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가 붙인 대자보가 학교에 게시되어 있잖아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다들 좋게 봐주시고, 그리고 학생들 참여와 관련해서 포스트잇을 배치했던 것도 좋은 선택이었어요. 참여 못 한 분들은 이름을 직접 옆에 쓰기도 했거든요.



Q. 계속해서 속보가 쏟아지고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지.

 

현석 : 개인으로서 학교에 바라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학내 사회, 특히 학생회 분들이 조금 더 용기를 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셔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어요. 설령 그들이 나중에 봤을 때 틀린 선택을 했다고 할지라도요. 저는 학교 이름에 ‘의혈중앙’이 괜히 붙은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미래의 지식인, 대학생으로서 용기를 내고 또 생각하여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용기를 냈으면 좋겠어요. 같은 생각들이 많은데 다 같이 참여하지 못하는 점이 조금 아쉽게 느껴져요.

 

 

Q. 개인이 속한 집단이나 정체성이 대자보를 쓰는 데 영향을 미쳤는지. 

 

서희 :  제 주변에 실명이 조금 무섭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저희가 현석이 생각으로 익명으로 진행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실명 참여’가 어렵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저는 이게 너무나도 당연한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참고로 카이스트 졸업식에서 일명 ‘입틀막’ 사건이 발생했을 때 학생 그 누구도 제재하지 않았어요. 무서운 것들도 있었고 당황스러운 것들도 있기 때문에 함부로 제재를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실명 쓰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다들 경험해 봤을 것 같아서, 그런 감정이 들었던 분들도 위로해 주고 싶어요.

 

현석 : 학생 참여 차원에서 누나랑 이야기했던 것 중 하나가 실명과 익명의 차이였어요. 우리의 슬로건이 ‘의에 죽고, 참에 살자’이기 때문에 실명으로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용기를 주고, 참여를 많이 유도하는 것이 제 목표였기 때문에 익명으로 추진하기도 했어요.  제 친구 중에 익명을 참여했다가 실명으로 바꿔 달라고 연락을 한 애들도 있어요. 저조차도 제 이름이 제일 잘 보이니까 긴장돼서 그게 더 잘 공감이 됐던 것 같아요. 



Q. ‘의에 죽고 참에 살자’ 라는 이 문장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서희 : 너무 어려운데요(웃음). 저는 사실 먼저 생각해 보면 ‘의에 죽고’ 보다는 ‘참에 살다’가 저에게 더 신념에 가까워요. MZ여서 그런지 죽는 게 조금 아쉽고요. 우리가 좀 올바르고 당당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요. 저는 민주주의가 가만히 있는다고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참에 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내고 행동해야지 유지가 되어야 한다고 봐요.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유지조차 되지 않거든요. 청년들이 되게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여론이 많아요. 저희는 이 상황이 ‘청년들이 오히려 정치의 중요함을 알기 때문에 목소리를 못 내는 것’에 대한 반증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탄핵을 가결이 가결된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정치적 효능감을 채울 수 있는 하나의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에 응해주시는 홍서희 학우(좌), 정현석 학우(우)

 



Q. 마지막으로 함께 해준 715인들의 학생들에게 한 마디 하자면.

 

현석: 그 학우들이 참여를 해주신 덕분에, 제가 쓴 대자보를 게시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들에게 담백하게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저도 많이 배웠어요. 이름도 적으시고 따로 연락도 정말 많이 주셔서 많이 배웠어요. ‘같이 연대하는 것이 이런 거구나’를 몸소 배워서 정말 고맙죠.

 

서희: 지금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고 개인적으로 느끼는 바도 다들 있겠지만, 앞으로의 국면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탄핵 다음이 더 중요하거든요. 우리가 벌써 두 번의 탄핵을 맞이하고 있으니까 이번에는 조금 더 끝까지 학생들과 사회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익명의 사회에서 실명을 밝힌 대가는 700명이 넘는 사람들의 참여여로 돌아왔다. 이 덕분에 중앙대학교 학생 사회는 그들이 원했던 이상에 조금 더 가까워졌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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