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 채효석
천용성은 중앙대 사회학과 06학번, 09년도 사회학과 학생회장, 동 대학원의 14학번이다. 2012년 2월에 ‘경험담’이란 예명으로 ‘하지만 언젠가’라는 싱글을 내며 데뷔했다. 경험담의 이름으로 2013년까지 몇 개의 싱글을 낸 후 대학원 생활을 하다가 2019년에 자신의 이름으로 ‘김일성이 죽던 해’라는 정규 앨범을 냈다. 2020년 17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올해의 신인’, ‘최우수 포크 음반’, ‘최우수 포크 노래’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고, ‘최우수 포크 음반’, ‘최우수 포크 노래’ 부문에서 상을 받으며 2관왕을 차지했다.
천용성은 ‘신인가수’라 불리며 ‘신인상’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기에 적은 나이는 아니다. 그가 걸어온 삶은 다른 음악인들에 비하면 이질적이었다. 그런 그가 어떤 과정을 거쳐 정규 앨범을 내고 음악을 ‘잘’ 하게 됐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그는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무대에선 통기타를 들고 잔잔하게 노랫말을 뱉었지만, 무대 아래서의 입담은 리암 갤러거를 연상시키는 락스타였다. 그를 흑석동에서 만났다.
천용성의 퓨어 인디 라이프
중앙문화: 안녕하세요. 연예인을 뵙는 기분입니다. 중앙문화를 읽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천용성: 네 읽어봤죠. 근데 많이 봐도 일 년에 두 번 보는 거니, 자주 봤다고 하기는 좀 그렇네요.
중앙문화: 자기소개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싶으신가요?
천용성: 17회 한국대중음악상 수상자. 이렇게 하면 됩니다. 중앙문화니까 특별히... 중앙대학교 사회학과 06학번 20060624 천용성입니다. 06학번이라니까 너무 옛날 같네요. 대학원 학번은 14학번입니다. 14학번으로 소개해주세요.
중앙문화: 먼저 음악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를 알고 싶은데요, 음악생활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천용성: 악기 연주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기타를 가르치려고 시도했으나 손이 아파서 관뒀고, 중학교 가서 다시 형한테 배웠어요. 작사·작곡은 대학 와서 대학가요제 나갈 때 시작했습니다.
중앙문화: 정규 음악 교육은 받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천용성: 중학교 때 기타 학원을 한 달 다녔어요. 근데 꾸준히 안 쳐서 실력은 한글에서 가나다 띤 수준이에요. 뭘 보면은 치기는 치는데 잘 친다거나 그런 게 아니고 ‘칠 수 있다’ 하는 수준.
중앙문화: 그럼 작곡은 따로 안 배우시고 혼자 시작하시게 된 거예요?
천용성: 그냥 시작했죠. 이렇게 이렇게 하나씩 눌러보고 하면 여러분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인내심이 필요해요 인내심이.
중앙문화: 대학가요제는 어떻게 참여하시게 된 건가요?
천용성: 그냥 나가고 싶었어요. 별로 그렇게 큰 의미는 없고. 고등학교 때 밴드를 했었는데 거기선 카피만 했어요. 대학교 와서 밴드를 하려고 봤는데 대학 밴드들도 다 카피를 하고 있더라고요. 밴드는 더 해보고 싶은데 카피는 하기 싫어서 노래를 써서 해보자 하는 거였죠. 대학생이 됐으니 창작을 할 때가 됐다 싶었죠. ‘남의 노래 쳐서 뭐해’ 그런 거죠. 그리고 저는 대학가요제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매년 본 사람 입장에선 나가고 싶었어요. 근데 전후가 뭔지는 모르겠어요. 창작을 하기 위해서 대학가요제를 나간 건지 대학가요제를 나가려면 창작곡이 있어야 하니까 작곡을 한 건지.
중앙문화: 대학가요제 나갈 때 팀은 어떻게 꾸리셨나요.
천용성: 밴드로 나갔는데, 저희 과 선배 두 명하고 제 고등학교 동창 한 명이랑 서울예대 다니는, 과 동기의 동생과 함께 했습니다. 악보를 그릴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전공자를 섭외해왔어요. 그렇게 다섯이 나갔어요. 곡은 제가 쓴 걸로 하고요.
중앙문화: 그때는 밴드 음악을 하셨던 거네요. 즐거우셨나요?
천용성: 밴드는 즐거울 수가 없는데 그때는 즐거웠어요. 대학가요제에서 상을 탔다면 밴드로서 풍파를 만나서 힘들었겠지만 저희는 단발성이었으니까 별로 싸울 게 없었어요. 그때는 대학가요제 나간다는 설렘이 더 컸어요. 녹음도 처음 해봤고 재밌었어요.
중앙문화: 그 이후로는 밴드는 안 하시고 작사·작곡만 하신 거예요?
천용성: 네. 밴드는 안 하고 틈틈이 작사·작곡만 했어요. 제가 친구 만드는 능력이 별로 없어요. 보통 친구가 생활 반경에 주어지잖아요. 근데 그거를 벗어나서 제가 사냥 가듯이 '친구 좀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을 한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하십니까 그런 거? 우리 과에 가서 ‘너 일본 가수 누구 알아?’ 그러면 몰라요. ‘아 얘네 뭘 모르네...’ 하면서도 그냥 걔네랑 노는 거예요. 우연하게 주변에 취향이 잘 맞고 밴드하고 싶은 애들이 있으면 좋지만, 그런 경우는 별로 없어요. 밴드를 하려면 새로운 친구를 찾아가야 하는데 굳이 그 정도까지 해야 하나 싶어서 자연스럽게 밴드를 안 하게 됐어요.
중앙문화: 그때도 작사·작곡한 걸 발표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셨나요?
천용성: 대학교 다닐 때도 유재하 가요제에 몇 번 냈어요. 다 안 돼서 나는 재능이 없나, 내 노래 별론가 보다 했었죠. 돈이 있으면 낼 수 있는데 대학교 땐 돈이 없잖아요. 근데 군대 가니까 돈이 벌려서 이때 냈죠. 저 ROTC 했다고 써주세요. 3,4학년 때 바보같이 경례하고 다녔어요. 아직도 경례하고 다닙니까? 이런 악폐습이 없어져야 하는데. 아무튼 돈이 있으면 남 시켜서라도 노래를 만들 수 있거든요. 그렇게 첫 싱글을 냈는데... 아 이건 적지 말아주세요. 적지 말아주세요는 적어도 돼요. 뭔 얘기를 했는데 이걸 빼달라고 했다고는 적어주세요.
중앙문화: 발표하고 싶다는 욕구는 계속 있으셨던 거네요.
천용성: 네. 주변 친구들에게 들려주곤 했죠. 그렇다고 음반을 내기 위해서 돈을 벌 정도로는 내고 싶지 않았죠.
중앙문화: 다른 학교 생활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학생회 활동은 어떠셨나요?
천용성: 제가 학생회장은 왜 했냐면 학생회장 선거철이 됐는데, 할 만한 사람이 없었어요. ‘뭐 까짓것 내가 하지’ 하고 했습니다. 중앙문화니까 제 투쟁사에 대해 말해줘야 할 것 같은데 별 거는 없었습니다. 대자보를 하나 쓰는데 ‘대자보를 붙일 거니 할 말 있으면 말해라’ 하고 인터넷에서 의견을 받았는데, 다 괜찮다고 해서 뽑아서 벽에 붙이니 댓글이 달리더라고요. 어떻게 이런 대자보를 붙였냐... 사회학과의 수치다... 이러더라고요. 이런 반응들이 이후에도 많아서 나중엔 대충 활동했습니다. 뭐만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고 해요.
아무튼 저는 시위현장 가는 게 엄청 무서웠는데 학생회장 되니까 갈 일이 생겼어요. 09년도에 용산참사가 일어나서 갔더니 용산 불난 곳 주변을 경찰들이 막고 있었어요. 그래서 새로 모인 장소가 명동이었는데 물대포가 왔어요. 그래서 방송을 하는 거죠. 물대포 쏜다고, 빨리 가라고, 진짜 쏜다고... 그래서 그때 저 데리고 갔던 총학생회장 누나가 “용성아 너 먼저 집에 가라” 해서 먼저 비열하게 집에 갔죠. 진짜 가도 아무런 해가 안 될 것 같은 곳은 가는데 그래도 무섭긴 해요.
중앙문화: 학생회 활동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학창시절을 보내셨나요?
천용성: 학생회, ROTC한 것 빼고는 별로 없어요. 1,2 학년 때는 근처에서 자취를 안 해서 학교에 잘 안 있었어요. 수업 끝나고 집 가서 책 읽고 쉬었어요. 3학년 때는 ROTC 가서 엎드려뻗쳐 하고 있어가지고 다른 걸 할 여력이 없었어요. 요즘도 그런 악폐습이 있다면 없어져야 한다고 써주세요. ROTC 48기였는데 앉았다 일어났다를 꼭 48개를 하래. 근데 자기들은 47기니까 47개만 했을 거 아니에요? 나보고는 왜 48개를 하라는 거야. 엎드려뻗쳐 하는데 팔을 뻗치고 있으면 손끝 라인을 다 맞추라는 거예요. 이런 거 다 써주세요. 문제가 많습니다.
중앙문화: 학부를 졸업하시고 나서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군 생활을 하시면서 2012년 2월에 첫 싱글(‘하지만 언젠가’)을 내서 데뷔를 하셨어요. 이때 기분은 어떠셨어요?
천용성: 실물 CD는 안 찍고 음원만 나왔는데, 별로 감흥 없었어요. 그냥 돈만 많이 들고. 냈다 하는 성취감 같은 건 있는데 사실 결과물이 되게 마음에 들고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중앙문화: 전역을 하고 나서는 ‘자립음악생산조합’ 1(이하 자립)에서 활동을 하신 게 맞나요?
천용성: 네 맞아요. 근데 활동까진 아니고 그냥 가입만 했어요. 군대 있을 때 두리반 투쟁 2을 하고 있었어요. 그 후에 자립도 생기고 했는데 관심을 갖고 있다가 전역하고 나서 가입한 거죠. 자립의 활동은 DIY 워크숍을 열어서 돈 없는 사람들이 음악 만드는 방법 같은 걸 가르쳐주거나, 기획 공연을 열거나, 시위 현장 가서 노래 부르고 연대하는 거였어요. 저는 워크숍은 잘 안 갔고 투쟁 하는 데는 가긴 했는데 많이 가진 않았어요. 조합의 공연에 참여한 것도 두 번 정도였고요. ‘분더바’라는 카페 투쟁 현장에서 한 번 노래를 불렀었고, 다른 한 번은 투쟁 현장이랑 관계없는 '전국인디노래자랑'이라는 기획 공연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그냥 유령회원이었죠. 돈만 내고 이 돈으로 ‘니네가 투쟁 열심히 좀 해라...’ 그런 정도였습니다.
중앙문화: 이 시기에(2012 9월~2013년) 일련의 싱글들을 내셨습니다. 이땐 어떤 식으로 음악 활동하셨나요?
천용성: 활동을 어떻게 정의할지가 중요한데 딱 음반을 내기만 한 것입니다. 내고서 어디 가서 ‘저 이거 냈어요. 노래 좀 시켜주세요’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내고 끝났어요. 애초에 목표는 실물 CD를 내는 거였어요. 하나씩 더해보자는 마음이었거든요. 음원을 내봤으니까 이번엔 CD를 찍어보자 이랬죠. CD 찍었으니까 ‘아 됐다’하고 향뮤직에서 팔고 음원유통 정도 했어요.
중앙문화: 첫 실물 CD를 받아보셨을 때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은데요.
천용성: 아무래도 좀 더 감흥이 있었죠. 첫 싱글은 편곡이랑 노래를 다른 사람이 했기 때문에 원래 제가 생각했던 노래랑 멀어진 게 나왔어요. 근데 제가 중간에서 그걸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도 안 됐고요. CD를 찍은 싱글(‘혼자서도 잘해요’)은 좀 더 제가 생각했던 모양새로 나와서 더 만족스러웠죠. 작업 과정도 재밌었고요.
중앙문화: 음반 제작은 어떻게 하셨나요. 자립에서 음반 내는 걸 도와주셨나요?
천용성: 거기서 도와준 거는 조합원 대상으로 대출 사업을 했는데 50만 원 빌려서 제 음반 제작비에 쓰고 갚은 게 다였어요. 제작 자체는 혼자서 했어요. 트위터에서 사람 찾아가지고 ‘저 이번에 음반 낼 건데 녹음이랑 해주세요’ 했더니 ‘어 와라!’ 해가지고 가서 했죠. 그런데 음반 뒤에는 자립음악생산조합 로고가 박혀있습니다. 자립에서 박아도 괜찮겠냐고 물어서 알겠다고 했어요.
중앙문화: 전역 후에 그렇게 싱글도 내셨고, 또 음향 엔지니어로 잠깐 일도 하셨어요. 그러다가 대학원을 진학하게 되는데 어떻게 결정하게 되셨어요?
천용성: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요. 엔지니어는 먹고 살기 힘드니까요. 대학원 간다고 먹고 살 길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면 무슨 길이 있지 않을까 해서 간 거죠. 뭐라도 해야겠다 싶으면 회사를 가면 되는데 회사를 가기 싫어서 대학원을 간 거예요. 두 선택지가 같은 선상에 놓여있다는 게 좀 이상한가요? 하나는 돈을 버는 거고 하나는 돈을 안 버는 건데.
중앙문화: 대학원 생활은 어떠셨어요?
천용성: 생각이 없던 건지도 모르겠는데 전 즐거웠습니다.
중앙문화: 대학원 다니면서도 틈틈이 곡 작업을 하셨나요?
천용성: 그때는 하나도 못 썼어요. 대학원 다니면서 할 수 있는 짬이 안 나요. 너무 바빴어요. 물론 안 바쁘게 다니는 분들도 있지만, 저는 읽어오라면 읽어가려고 노력을 했거든요. 근데 읽어갔는데도 뭐 물어보면 뭐라고 말을 못 하겠어서 ‘아 이럴 거면 읽어가지 말까’는 생각도 하긴 했는데 그래도 열심히 읽어갔어요. 그러니까 노래 만들 시간이 없었죠.
중앙문화: 대학원에서 문화사회학을 전공하셨잖아요. 여기서 공부하거나 연구했던 것이 음악 생활과 연관되는 부분이 있나요?
천용성: 제가 2006년에 대학을 와서 대학원 수료를 2016년에 했으니까 어쨌든 10년 동안 사회학 책을 읽고 사회학 수업을 들은 거잖아요. 제 인생의 무려 1/3을 사회학과 함께 지낸 거죠.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제 삶에 영향을 끼쳤을 텐데 또 직접적으로 음악에 영향을 끼쳤냐고 물으면 애매합니다. 넓게 보면 분명히 관련이 있기는 합니다. 에를 들어서 제 노래 중에 ‘나무’라는 노래가 있어요. 이 노래는 책을 읽고 쓴 건데 이 책을 읽은 이유가 ‘노동자연대 연구’라는 수업 때문이었어요. 그 수업 과제를 할 때 시위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알아보기 위해서 투쟁이 담긴 책을 찾아보고 읽다가 그걸 노래로 옮겼어요. 이런 식으로 제가 사회학하면서 좀 더 관심 있는 문제들이 생기고 그런 관심들이 노래가 되는 경우가 있죠. 제가 노래를 하다가 막스, 베버의 얘기를 하면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하겠지만 그러면은 노래가 이상하게 들리겠죠.
중앙문화: 문화사회학을 전공하신 계기 자체는 음악과 관련이 있나요?
천용성: 전혀 상관 없어요. 음악 관심 두기 전부터 중앙대 사회학과의 문화사회학을 담당하시는 주은우 교수님을 마음에 들어해서 전공하게 된 거예요. 학생이 교수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표현이 이상한데, 그냥 그대로 적어주세요. 표현이 이상한데 그대로 적어주세요도 그대로 적어주세요. 전 교수님이 좋아서 문화사회학을 선택한 거죠. 다른 좋은 교수님들도 많은데, 뭔가 주은우 교수님과는 얘기가 통하는 것 같았어요. 저의 가정입니다. 교수님은 ‘아 얘 말 안 통하네’라고 생각 하셨을 수도 있어요. 아무튼 제가 우리 과에 노동 분야 담당하시는 교수님께 가서 ‘교수님 저 프로듀스 101에 대해서 논문을 써볼까 합니다’라고 하면 ‘프로듀스 101이 뭐니’라고 하신단 말이에요. 근데 주은우 교수님한테 가서 그 얘기를 하면 뭔지는 아시거든요. TV를 많이 보시는 것 같아요. 근데 너무 섣불리 전공을 선택했나 싶기도 해요(웃음).
천용성의 퓨어 인디 뮤직
중앙문화: 천용성 님의 음악 생활 복귀와 정규 앨범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나눠볼까 해요. 그런데 예전에 경험담이란 예명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천용성: 노래를 쓰면 자꾸 이거 경험담이냐고 물어보는 게 짜증나서 경험담으로 했습니다.
중앙문화: 2013년 이후 오랜 음악적 공백 기간이 지나고 나서는 왜 자신의 이름으로 앨범을 내야겠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천용성: 경험담이란 이름이 일단 촌스럽습니다. 어디가서 ‘너 이름이 뭐니’라고 물었을 때 ‘경험담입니다’라고 말하기 부끄럽습니다. 촌스럽고 부끄러워서 활동명을 바꿨습니다.
중앙문화: 꽤 긴 시간 동안 음악 활동을 안 하셨잖아요. 갑자기 정규앨범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신 이유는 뭔가요?
천용성: 뭐~라도 해야겠어서요. 논문을 써야하는데 논문 쓸 힘이 안 났어요. 논문 주제를 몇 번 바꾸고 최종 주제로 제안까지 했는데 되게 궁금했다기보다는 ‘뭐 그런 거지~ 이걸 가지고 논문까지 써야하나’ 싶었어요. 사실 이런 주제도 논문으로 써야 하거든요. 엄청 뻔해 보이는 것도요. 이런 게 연구자의 자세인 건 맞아요. 근데 저는 흥이 안 생기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우울감도 느꼈던 시기라 다른 걸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앨범을 만들었습니다. 싱글을 내봤고, 3곡짜리 CD도 내봤으니까 다음 차례는 정규라고 생각했죠. 개인적으로는 나름 천천히 코스를 밟아가고 있던 거예요. 10년에 걸쳐서. 여러분도 오랫동안 하시면 뭔가를 이룰 수 있으실 겁니다.
중앙문화: 단편선 3 님이 정규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아주셨어요.
천용성: 제가 메일을 보냈습니다. 내가 앨범을 낼 건데, 도와달라. 예전에 알던 사이었거든요. 데모를 만들어서 15곡 정도를 추려서 보냈어요. 제작 과정은 아주 유쾌했습니다. 제 뜻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거의 단편선 씨 뜻대로 됐죠. 그래서 화기애애하게 했습니다.
중앙문화: 경험담 때 싱글을 내실 때는 객원 보컬을 많이 쓰셨잖아요. 그런데 정규 앨범을 내셨을 때는 본인이 거의 노래를 하셨어요. 이 변화는 왜 일어난 건가요?
천용성: 돈이 없어서요. 원래는 훨씬 더 많은 곡들을 다른 사람들이 부르게 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서 제가 부른 거예요. 선생님 저 내년에 2집 나올 건데 그때 텀블벅(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후원 하셔야 합니다. 비싼 걸로 하셔야 합니다.
중앙문화: 제일 리워드 많은 걸로 하겠습니다.
천용성: 그럼 100만 원짜리 후원 만들겠습니다(웃음).
중앙문화: 정규 앨범에서는 도마, 곽푸른하늘 씨가, 최근 싱글(‘중학생’)에서는 임주연 씨가 곡의 피쳐링을 해주셨잖아요. 나름대로 화려한 라인업인데 섭외는 어떻게 하셨나요?
천용성: 섭외는 단편선 씨가 알아서 합니다. 저한테 물어봐요 의사를. ‘이번에 곽푸른하늘을 부르면 어떨까’하면 ‘좋습니다’하죠. 저는 거의 다 좋다고 해요.
중앙문화: 처음에 곡 쓰실 때부터 이거는 다른 분께 맡겨야겠다고 생각 하고 쓰시는 거예요?
천용성: 거의 모든 노래를 제가 안 부른다고 생각하고 씁니다. 근데 남자 중에는 제 곡의 분위기와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그래서 거의 다 여성 분들에게 맡기는 거죠. 남자 보컬 중에 잘 부르는 사람은 많아요. 근데 제 노래가 못 부르는 느낌으로 잘 불러야 하거든요. 그런 사람이 잘 없어요. 못 부르는 느낌으로 못 부르는 사람은 생각이 나요. 근데 나도 못 부르는 느낌으로 못 부르니까 그냥 내가 부르자 싶은 거죠.
중앙문화: 실물 CD를 처음 내셨을 때 그에 대한 성취감이 있으셨다고 했는데, 정규앨범을 처음 내셨을 때의 감회는 어떠셨나요?
천용성: 근데 막상 내면 그냥 그래요. 저는 이게 나올 거를 1,2년 전부터 알고 있던 거잖아요. 그래서 응당 일어날 일이 일어난 느낌이에요. ‘아 이제 다 했다 좀 쉬어야겠다’ 이 생각이 들지, ‘와 드디어 내가 1집 가수가 됐어’ 이런 기분은 아니었어요.
중앙문화: 앨범 제작기를 ‘내역서’라는 책으로 만드셨잖아요.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시게 된 거예요?
천용성: 텀블벅 해야 돼서요(웃음). 리워드를 줘야 되는데 리워드를 뭐 할 게 없잖아요. 잘 생기면 포토카드라도 만들겠는데 그게 안 되잖아요. 티셔츠를 만들면 천용성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티셔츠를 왜 삽니까. 그래서 책이라도 주자했습니다.
중앙문화: ‘내역서 2’를 만들려고 또 2집 작업기를 홈페이지에 쓰시던데 그런 걸 보면 내역서 1의 반응이 되게 좋았나봐요?
천용성: 아뇨. 별로 반응이랄 게 없었어요. 다 텀블벅 리워드로 줘버려서요. 그냥 개인적인 피드백 온 거는 먹는 얘기가 너무 많다 정도였어요.
중앙문화: 책이 음악가를 판단하는 근거를 제시할 때 어떻게 차별화된다고 생각하세요?
천용성: 구구절절하게 말할 것이 필요해요. 유튜브에서 구구절절하게 말하면 아무도 안 보고, 공연 때도 구구절절하게 말할 수가 없잖아요. 방송이나 인터뷰에서도 매체 특성상 잘 말하지 못 하는 얘기들이 있어요. 근데 책은 구구절절하려고 쓰는 거니까 읽는 사람이 ‘얘 왜 이렇게 구구절절하게 썼냐’는 생각을 안 하겠죠. 팔기도 좋아요. 라디오 인터뷰한 거나 유튜브 올린 건 돈 주고 팔 수가 없으니까요.
중앙문화: 엄청 많이 들으셨던 질문이겠지만, 앨범 제목이 왜 ‘김일성이 죽던 해’인가요?
천용성: 동명의 곡이 있잖아요. 음반에 속한 곡들의 제목을 앨범 이름으로 하나씩 넣어봤어요. 뭐가 가장 앨범의 전체적인 톤과 어울리면서 읽기나 듣기에 거북함이 없고 재밌으면서 너무 가볍지도 않은지 고민했어요. 김일성이 죽던 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좋은 작명이면서 앨범 전체의 콘셉트를 보여주고, 어그로를 끌 수 있어서 좋아보였죠. 제목을 보고 궁금해서 눌러볼 수도 있으니까요.
중앙문화: 앨범 전반적으로 유년 시절이 짙게 깔려있단 느낌을 받았거든요. 곡을 쓰실 때 먼 과거를 많이 되돌아보시는 편인가요?
천용성: 일부러 되돌아보진 않지만 떠오르는 게 있을 때 돌아봅니다. 뭘 하다가 가사가 생각나서 1절을 써요. 1절은 아주 술술 나옵니다. 근데 2절은 1절의 소재와 주제와 바이브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다른 표현·메타포를 찾아야 하잖아요. 이걸 찾을 때 사람이 가진 게 과거밖에 없으니 과거로 돌아갑니다.
중앙문화: ‘분더바’나 ‘나무’같이 사회적인 주제를 다룬 가사들도 있잖아요. 이런 곡들은 메시지를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쓰시는 건가요?
천용성: 별로 생각없이 씁니다. 메시지 전달하는 거는 진짜 싫어합니다. 뭔가 선전 영화 같은 느낌이 되기 때문에요. ‘분더바’도 묘사만 있을 뿐 딱히 메시지는 없습니다. 제가 뭐라고 메시지를 줍니까. 시위에서 맨날 피 흘리고 싸우시는 분들한테 가서 ‘선생님 제가 노래를 하나 써왔습니다’하면서 ‘다 죽여버리자~~’ 이러면 ‘쟤 뭐하는 애야?’ 이러시겠죠. 제가 딱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분야도 없고요.
중앙문화: 그럼 가사로 전달하고 싶은 것은 천용성 님이 당시에 느낀 감정이나 생각 정도인가요?
천용성: 전달하고 싶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써서 읽기에 그럴 듯하다 하면은 가사가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노래 가사의 ‘화자’와 노래 부르는 ‘나’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중앙문화: 앨범의 홍보문구가 ‘순도 1000% 퓨어 인디포크’잖아요. 이건 어떤 의미인가요?
천용성: 전혀 의미 없습니다. 그냥 장난입니다. 홍보 문구가 필요한데 제가 이제껏 활동을 전혀 안 하고 뜬금없이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근거 없는 장난밖에 들어갈 게 없는 거죠. 장난으로 하는 말 중에 ‘인디 최장신’, ‘대형 가수 천용성’(천용성 씨는 키가 189cm다.) 이런 게 있는데 이런 걸 쓸 수는 없으니까 재밌으면서도 무해한, 밉지 않은 말장난을 골랐습니다.
중앙문화: 장르가 주로 포크로 분류됩니다. 포크라는 장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시고 하시는 건가요? 포크를 하는 특별한 의미가 있으신가요?
천용성: 저는 전혀 생각 없습니다. 홍보 문구는 저렇게 써놨지만 포크라고 딱히 생각도 안 해요. 굳이 분류를 해야 하면 포크에 들어가야 될 것 같긴 한데 저는 노래만 좋으면 됐지 어디로 분류되든 중요치 않다고 생각해요. 근데 포크를 좋아하긴 해요. 어울리는 사람들도 포크하는 사람들이 많고, 공연하는 형태도 보면 기타 하나 들고 노래하니까 포크처럼 보이겠죠. 하지만 포크에 소속감이나 자부심은 없습니다.
중앙문화: 그냥 통기타 들고 음악을 하다 보니까 포크 가수처럼 인식된 건가요?
천용성: 통기타도 별로 들고 싶지 않아요. 정태춘 씨처럼 본인이 정말 통기타로 노래하고 싶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저는 통기타 드는 데도 별로 관심 없고 노래도 하기 싫어요. 돈이 없어서 자기 혼자 해결해야 하다 보니까 노래도 하고 통기타 드는 거죠. 그래서 앨범과 실제 공연할 때 편곡이 다른 게 많아요. 만약 제가 공연했을 때 사람이 많이 와서 기본 수익이 확보가 된다면 팀을 꾸려서 연주 잘 하는 사람들과 노래 잘 하는 사람을 데리고 다니고 싶어요. 옆에서 MC나 보면서 ‘이번 곡은 제가 썼고요, 훌륭한 연주와 보컬 잘 들어주세요.’ 하는 거죠.
중앙문화: 창작은 하고 싶은데 노래나 악기 연주는 별로 하고 싶지 않으신 거예요?
천용성: 잘 못하는데 굳이 할 필요 있나 싶어요. 돈 주고 보러 온 사람들한테 그만큼 값어치를 하고 싶어요. 제 공연 티켓이 보통 2만 원 정도 하는데 기회 비용을 따져보면 2만 원 주고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이 많잖아요? 책을 한 권 사고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고, 영화를 보면 두 편을 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다른 문화 생활만큼 문화적 충족을 주고 싶어요. 막상 보러 온 사람들은 전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긴 하는데, 저는 마치 불량한 상품을 파는 것 같아서 찝찝한 기분이 있어요.
중앙문화: 최근에 ‘중학생’ 싱글을 내셨잖아요. 중학생이란 곡이 기존의 곡들과는 다르게 곡 길이도 길고, 일렉기타 솔로도 길더라고요. 이런 식으로 차후에 다르게 시도해보고 싶은 스타일이 있으신가요?
천용성: 키린지(일본의 밴드) 같은 팀을 베껴야겠다는 생각은 하는데 너무 잘해서 못 베끼겠어요. 좋은 거, 잘하는 거 들으면 나도 이런 걸 해봐야겠다고 그때 그때 생각들 때는 있는데 잘 안 돼요. 키린지만큼 잘하고 키린지의 느낌이 나면서도 천용성의 비중이 더 큰 정도로 하는 게 어렵죠. 그래서 ‘무슨 음악을 하고 싶냐’고 물으면 딱히 없고, 앨범 하나를 사면 좋아하는 곡 한두 개 얻어걸리는 그런 걸 만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중앙문화: 요즘엔 일과 음악 생활을 병행하시나요?
천용성: 단기 알바 들어오면 하고, 고정적 일은 안 해요. 대학원 선배가 녹취 푸는 알바를 주면 하고, 작년에는 장애인 단체에서 연극하는데 노래 만들어 달라고 해서 노래 만들어주고 그랬어요. 나머지는 집에서 주는 용돈이나 음원 수입으로 먹고 살고 있죠. 집에선 아직도 저 대학원 다니는 줄 알고 용돈 주세요. 그 돈으로 음반 만들 줄을 모르고. 용성이가 띨빵해가지고 석사 논문을 못 쓰고 있는 줄 알아요. 그것도 맞긴 한데요(웃음).
중앙문화: 프로음악인이라고 생각을 안 하시잖아요. 반 음악인, 반 생활인으로 사는 삶이 어떠신가요.
천용성: 지금은 좋은데, 지금은 용돈을 받기 때문에 좋은 거예요. 용돈이 끊기면 생활이 어려워져서 일을 가져야하죠.
중앙문화: 앞으로 풀타임 일이랑 음악을 병행 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천용성: 아니요. 저는 안 가능해요. 저는 창작욕이 그 정도로 샘솟지가 않아요. 샘솟는 사람은 8시간 일하고 와도 샘이 솟으니까 만들면 되거든요. 근데 저는 할 일 없이 노는 시간에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노래를 만드는 쪽이기 때문에 노는 시간이 없으면 노래를 못 만들어요.
중앙문화: 그럼 전업음악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계신가요?
천용성: 되면 좋죠. 프로가 선언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돈이 그만큼 벌린다는 거잖아요. 2집을 내고 나서 제 앞길을 결정할 거 같아요. 월 수입이 최저임금을 월급으로 환산한 금액 정도로 나오면 전업이 되는 거고 그게 아니라면 뭔가 먹고 살 길을 찾아야겠죠.
음악 활동으로 연봉 2000만 원이 되는 대신에 제가 원치 않은 일들을 해야 한다면 전 할 수 있거든요. 제가 음악 만드는 거에만 터치 안 하면 돼요. 춤추라면 춤 출 수 있어요. 나한테 그런 걸 안 시켜서 문제지. 일요일 아침에 출발 드림팀 나가라고 하면 나갑니다. 인삼 축제 가서 노래하라고 하면 합니다. 뭔 상관이에요 그렇게 돈 벌면 좋죠. 근데 전업음악인이 될 거라고 엄청 기대하고 있지는 않아요.
중앙문화: 첫 정규앨범으로 한국대중음악상(이하 한대음) 2관왕을 하셨어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천용성: 좋습니다. ‘그런 식상한 질문 좀 이제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적어주세요. 요즘 체감을 살짝 하고 있어요. 수입이 늘었습니다. 두 배가 됐는데, 애초에 많이 벌던 게 아니라서요. 평소에 음원으로 10만 원, 15만 원 벌었다면 상 타고 다음 달에는 30만 원인가 들어왔어요.
중앙문화: 그러면 알아보시는 분들도 계신가요?
천용성: 전혀 없어요. 아무도 몰라요. 그래서 대충 하고 다녀요. 오늘도 대충 하고 나왔잖아요. 오늘은 특별히 그래도 수염을 깎았습니다.
중앙문화: 한대음 같은 시상식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세요?
천용성: 저는 좋죠 상 탔는데. 저 같은 사람이 상 탈 수 있는 게 그래도 한대음밖에 없잖아요. 선정 방식이나 결과에 아쉬움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죠. 저도 제 선정 결과에 아쉬움이 있습니다. 제 노래 ‘대설주의보’가 최우수 포크 노래로 상을 탔는데 이게 딱히 포크는 아니란 말이에요. 이런 의아함은 있죠. 의아함을 더 많이 가진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근데 그 정도가 한국 음악 시장의 현 주소 아닐까요. 한대음이 더 좋을 수도 있겠죠. 심사 기간도 늘리고 선정을 더 공정하게 하고 선정위원도 늘리고 상 주는 분야를 늘릴 수도 있고요. 근데 심사위원 풀도 작고, 한대음이 끌어올 수 있는 돈도 적으니까 어쩔 수 없죠. 결국 시장의 크기와 돈의 문제인 것 같아요.
중앙문화: 요즘에 본격적으로 음악 생활에 박차를 가하는 느낌이신 거죠. 최근 일과를 소개해 주세요.
천용성: 공연 있는 주는 거의 공연 연습하고, 공연 없는 주는 ‘공연 했으니까 이번 주는 좀 쉬자’ 해서 한 주 쉬어요. 게으릅니다. 한 주 쉬면 ‘아 이제 좀 만들어야겠다’하고 만들죠.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요. 이번에 기타를 새로 사서 기타 세팅도 하고 있고요. 기타 소리가 실제로 나는 거랑 마이크 타고 스피커 타서 나는 거랑 소리가 되게 다르거든요. 그 간극을 줄이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근엔 ‘랏도의 밴드뮤직’에서 라디오 DJ도 하고 있는데 즐겁습니다. 금요일마다 나가야 돼서 짜증나긴 하는데 청취자들이랑 말이 통하니까 좋습니다. 주은우 교수님과 대화하는 것처럼요.
중앙문화: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시나요?
천용성: 2집이죠. 내년 6월 24일에 나옵니다. 물론 그때 가면 밀리겠죠. 근데 일단 정해놨어요. 올 가을이나 초 겨울부터 제작에 들어가서 제때 맞춰서 나오게 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데모를 열심히 만들고 있습니다.
중앙문화: 마지막으로 하시고픈 말씀해주세요.
천용성: 제 음악 들어주세요. CD랑 LP 사주시고, 공연도 와주세요. 동문인거 밝히면 제가 특별 서비스 해드리겠습니다. 사인 시디를 준다거나, 사인을 크게 그려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인스타 팔로우 해주세요(@yongsung000). 동문이면 맞팔해드립니다.
- 2011년 생긴 음악생활협동조합. 작은 규모의 음악생산자들이 자유롭게 음반과 공연 등 음악과 관련된 작업을 기획하고 진행하는데 가장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음악생산의 인프라를 구축해나가는 것을 1차적인 목표로 하고 있다. 또한 홍대앞뿐만 아닌 다른 지역에도 새로운 씬을 만들어나가는데 많은 힘을 쏟고 있다. 출처: 자립음악샌상조합 누리집 [본문으로]
- 강제 철거 위기에 놓였던 홍대의 국수집 ‘두리반’을 지켜내기 위해 2009년부터 2011년까지 531일간 진행했던 투쟁. 이를 계기로 자립음악생산조합이 탄생했다. [본문으로]
- 싱어송라이터이자 2013년에 데뷔한 밴드 ‘단편선과 선원들’에서 활동했던 멤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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